그건 밤에 일어난 일.
저녁 식사 후, 갑자기 아멜리가 말을 걸었다.
「테리, 메니, 잠깐 시간 있어?」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아멜리가 우리 팔을 잡아당겨 방으로 데려갔다. 아멜리의 방에 진열되어 있던 것은 세 벌의 드레스.
물색 드레스, 핑크색 드레스, 하얀색 드레스.
「어느 게 나한테 어울릴 거 같아?」
메니와 내가 얼굴을 마주 보고 동시에 아멜리를 봤다. 내친김에 나는 팔짱을 꼈다.
「갑자기 뭔데?」
「좋은 질문이야! 테리! 이번에 레이첼 생일 파티 열리잖아? 나 갔다 오려 하거든! 그래서 평소보다 멋지고 소녀답고 가련하고 아름다운 차림으로 가려고!」
「좋아하는 거 입고 가면 되잖아」
키드 때문에 엉덩이가 쑤셔서 저녁 먹고 나서는 방에서 편하게 쉬려고 했더니 이 꼴이었다. 퉁명스럽게 말하자 아멜리가 주먹을 움켜쥐고 발끈 열을 내기 시작했다.
「테리, 난 꽤 진지하다구. 진심으로 레이첼을 넘어설 정도의 멋지고 가련하고 근사하고 우아하고 브라보하게 차려입고 싶어. 그러기엔 내 힘만으로는 역부족인걸. 마침 나한테 또래 나이대인 여동생이 둘 있으니까 이번엔 너희한테 평가를 들어보려고」
아멜리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왜, 전에 어드바이스 해준 적 있었잖아. 그런 식으로 골라줘 봐」
「골라보라니 간단한 일 마냥 말하네…」
내 옆에 있던 메니가 내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겼다.
「테리 언니, 그 레이첼 양이 누구야…?」
레이첼.
그 이름을 듣고 나도 아멜리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멜리 소꿉친구야. 성격 고약하니까 넌 상종도 하지 마」
「맞아! 그 녀석 진짜 괴팍하거든! 나보다 몇 배나 심술궂으니까 메니는 개랑 놀면 안 돼!」
「네, 네에!」
나와 아멜리가 날을 잔뜩 세우자 메니가 푹푹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다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있잖아, 사이 나쁜 사람이 여는 파티에 왜 아멜리 언니는 가려는 거야?」
「그건 말이지, 메니, 안 가기라도 했다간 『내 아름다운 모습을 볼 엄두가 안 나서 안 오는 거구나』 라는 헛소리나 하면서 사람 바보 취급 할 테니까」
까득, 아멜리가 이를 악물었다.
「분하잖아! 그러면!」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안 가면 되잖아. 그런 녀석은 알아서 자멸할 거라니까」
「넌 또 왜 이런대! 전까지는 저런 놈 때려눕히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면서!」
「……마음이 바뀌었어」
(기억이 되살아난 판에 레이첼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다만 아멜리가 화내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레이첼에게 좋은 추억이란 없었다. 그녀의 파티에 참석하면 어김없이 영애들 사이의 음습하고 추악한 말다툼이 벌어졌다. 특히 아멜리와 레이첼은 동갑에 알고 지낸 시간도 긴데 어째서 그렇게나 사이가 험악한지 묻고 싶어질 정도로 곧잘 싸웠다.
(그리워라…)
저 녀석의 드레스에 달려 있던 브로치를 뜯어서 뺏어갔었나.
(……초대장이 왔을 때 안 간다고 하길 잘했지 뭐야)
쓸데없이 싸움에 엮이지 않는 게 좋은 법이다.
(레이첼 걔도 그래. 괜한 싸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건만)
(…아멜리도 딱 잘라 거절하면 될걸)
왜 레이첼만 엮이면 발끈하는 걸까.
(그렇게 되면 얼른 정해야지)
나는 빨리 내 방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엉덩이를 요양하고 싶거든.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야. 키드 때문에 얼얼해. 그 자식 진짜 싫어. 뒈져버렸으면 좋으련만.
세 벌의 드레스를 보고 아멜리를 본 다음 드레스를 지목했다.
「흰색」
「핑크는?」
「그 분홍색 드레스, 디자인도 색감도 너한테는 안 어울려. 덤터기 당한 느낌밖에 안 들어. 버리지그래?」
「그렇게 매정한 말 하지 마. 이거 맘에 든 거란 말이야」
「그 흰색 드레스에 노란색이나 녹색 물방울 무늬 리본을 허리에 감으면 예쁠 거야. 심플 이즈 베스트. 생일 파티면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그러자 아멜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렇게 밋밋한 색 리본을 나보고 하라는 거야?」
「봐봐. 드레스가 심플하잖아. 무늬가 있는 리본을 허리에 매기만 해도 완전 달라 보인다구. 게다가 네 머리 색깔엔 노란색이나 녹색이 잘 어울려. 머리도 어차피 화려하게 하고 갈 거잖아. 그럼 드레스 정도는 차분해야지. 정글에 놀러 나갈 것도 아니고」
「정…」
아멜리가 말을 잇지 못한 채 경직됐다. 나는 무시하고 아멜리의 옷장을 열었다.
「구두는…」
옷장 안에 있는 유리 재질 신발 상자를 바라봤다.
「이거」
아멜리 발에 딱 맞는 흰색 펌프스.
「가방은 이거」
아이템을 들고 옷장에서 나왔다. 멍하니 서 있는 아멜리에게 건넸다.
「자」
「…까만 거 신고 가려고 했는데」
「하얀 드레스에 검은색 구두가 어울리겠니」
디자인에 따라서는 어울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거에는 이 구두가 제일 심플하니 좋아」
세 벌 중에 고른다면 가장 아멜리한테 어울리는 코디다.
「음?…」
아멜리가 구두를 보고 가방을 보고, 드레스를 보고 납득 못한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드레스룸을 가리켰다.
「갈아입어 보지그래?」
「알았어」
아멜리가 드레스와 소품을 가지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문도 닫았다. 후 하고 한숨 돌리자 메니가 반짝반짝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테리 언니 굉장해! 드레스가 다 귀여워서 너무 고민됐어」
「그래. 드레스만 놓고 보면 귀여운 게 맞지」
(너는 다 잘 어울리겠지. 미인이니까)
「사람에 따라 어울리는 것하고 그렇지 않은 게 분명 있는 법이거든. 아멜리는 어울리지 않는 거에다 손을 대니까 한번 옷장 안에 있는 드레스를 싹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했더니 드레스룸 안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무례하긴! 다 잘 어울리거든!」
「아멜리, 다음에 또 봐줄 테니까 한번 드레스 정리나 하자. 어차피 한 번도 안 입은 것도 있을 거 아니니」
「그래! 다음에 꼭!」
(언제가 될는지)
아멜리가 레이첼 생일 파티에 가있는 동안에라도 임의로 정리해버릴까.
(역시 안되려나)
「다 입었어?!」
아멜리가 드레스룸 문을 열었다. 메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와아!」
메니가 눈을 반짝이며 아멜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굉장해! 큰언니! 엄청 잘 어울려!」
「어? 그, 그러니?」
「응!!」
예상 이상의 메니의 반응에 아멜리가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니는 순수하게 눈을 빛내며 두 손을 잡았다.
「웨딩 드레스 같아!」
(메니, 너무 띄워 준다)
마음속으로 딴지 걸고 있는 와중에 아멜리가 히죽, 뺨을 느슨하게 풀었다
「어머?! 과찬 아니니! 메니도 참! 못 말린다니깐!」
아멜리가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방에 장식되어 있던 꽃을 꽃병에서 꺼내 손에 들었다.
「어때?」
「우와! 신부 같아?!」
「오호호! 이걸로 나도 신부 영애야?!」
(너도 옳거니 하고 으쓱거리구만)
속으로 딴지 걸며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봤다.
아멜리와 메니는 꺄아꺄아 후후 거리며 목걸이나 귀걸이가 든 상자를 열고 끄집어냈다.
「큰언니, 이건?」
「어머, 귀엽다! 근데 이것도 괜찮네!」
「와, 근사하다! 언니!」
「레이첼 녀석! 멋진 나를 보고 놀라도록 하여라!!」
「이만큼이나 예쁜걸! 아멜리 언니, 다들 질투할걸!」
「정말이야! 메니! 곤란한걸! 나 참가자 레이디 전원한테 질투를 받게 되겠지!! 내가! 너무 아름다우니까!!」
아멜리가 허리에 손을 얹고 입 앞에 손을 가져다 대고 웃기 시작했다.
「오홋홋홋호!」
(무사태평한 것…)
레이첼을 이길 생각밖에 없는 무사태평한 아멜리.
(한가하기도 하지)
아멜리는 모르고 있으니까.
(기억하고 있는 건 나 밖에 없으니)
레이첼에게 들은 말.
「아멜리안느! 아아, 이 얼마나 초라한 꼴일까!」
쇠창살 너머로 레이첼이 실실 웃으며 주저앉은 아멜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걸! 옛날부터 당신은 건방졌으니까! 오호호호! 아아, 실로 유쾌하네요!」
아멜리가 레이첼을 노려봤다. 그러나 레이첼은 말을 이어나갔다.
「사과를 훔쳐서 붙잡혔다면서요? 후훗. 그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면 우리 쪽에서 사용인으로 일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히죽 웃었던 것이다.
「아니, 당신 같은 추악한 여자는 절대로 안 써줄 거지만」
캬하하하하!!
「벡스 가도 완전히 추락했구나!!!」
꼬락서니 좀 보라지!
「오홋홋홋홋홋홋!!!!」
그 말만을 하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 일부러 그 녀석은 우리를 만나러 왔다.
아멜리는 분을 못 이겨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첼은 그 후에도 아멜리를 매도했다. 깊어진 증오를 발산하듯 도망갈 곳이 없어진 아멜리를 마구 몰아넣었다. 내뱉어냈다. 그리고 웃었다. 아멜리는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레이첼을 노려봤다.
「아아, 싫어라. 이런 곳에 있으면 나한테까지 시궁창 냄새가 옮을 거 같아. 안녕히. 벡스 가 여러분. 난 이럴 게 아니라 새로 오픈한 찻집에서 케이크라도 맛보도록 할까요. 오호호호호!」
레이첼이 감옥에서 나가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 이제 돌아오지 않겠거니 확신하는 순간 아멜리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 것이다. 땅바닥을 두들기고 젠장이라고 고함치며 울부짖었다.
아멜리는 꽤나 분했던 거겠지.
아멜리는 꽤나 후회했던 거겠지.
아멜리는 꽤나 원통했던 거겠지.
나는 그 등을, 단지 그 광경을 무릎을 감싸 안고 바라보는 거 밖에 할 수 없었다.
(…거절하지 그랬니)
분노에 불타고 있는 아멜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첼하고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불쾌한 험담이나 들을 뿐이야.
(나는, 이제 질색이야)
레이첼 얼굴 따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어때? 테리!」
아멜리가 말을 걸어서 넋 놓고 있다가 의식을 되찾았다. 아멜리를 봤다. 나는 눈썹을 하나로 모았다.
「아?」
번쩍번쩍하게 치장한 아멜리를 보고 입꼬리를 올리고 들떠있는 메니를 보고, 내 탱글거리는 푸딩이 머릿속에 놓인 접시로 튀어나왔다.
「네년! 무슨 지거리냐!」
「후아!?」
아멜리의 손을 붙잡고 재빨리 소품을 뺏어갔다.
「잠깐! 무슨 짓이야! 테리!」
「시끄러! 번쩍번쩍 대긴! 거기다 별이 달린 티아라라도 달지 그러지! 네년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될 셈이냐!!」
나는 소품을 뚝딱 상자에 돌려놨다. 진주 목걸이만 목에 두른 심플한 아멜리로 돌아왔다.
「에에!」
아멜리가 거울을 보고 불만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밋밋해?」
「응. 조금 쓸쓸한 거 같아」
메니도 아멜리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치! 메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멜리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쓸쓸하다니. 이봐, 테리. 무슨 생각이야. 저기」
「시끄러워라…. 드레스에 리본을 달지 않아서 쓸쓸해 보인다구…. 내일이라도 사러 가…!」
빤히 노려보자 아멜리가 메니 옆에 섰다.
「우와, 이거 봐. 테리. 테리 얼굴 좀 보라구. 친언니나 째려보고. 귀족영애 신분에. 촌스러워. 꼴불견이야. 메니, 기억해두렴. 저게 질투하는 표정이란다」
「저기 테리 언니, 그러면 안 돼. 다 같이 사이 좋게 지내야지!」
(닥치고 있어! 배신자가!!)
칫! 혀를 차고 팔짱을 꼈다.
「리본 달면 끝이야. 자, 됐어? 만족하니?」
「후후! 알겠어. 말한 대로 내일 드레스 리본을 찾아볼게」
「무늬 있는 거. 물방울 무늬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무늬라면 뭐든지 좋을 거야」
「그래. 고마워!」
「이상. 해산」
나는 진절머리 내며 휙 아멜리의 방에서 나갔다. 메니도 한 번 아멜리에게 미소 짓고는 내 뒤를 따라왔다. 메니가 아멜리 방의 문을 닫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하아…. …피곤해…」
「그런데 언니 말대로 큰언니한테 언니에게 꼭 어울렸어」
메니가 가슴 앞에서 양손을 잡고 방긋댔다.
「신부 같았어!」
「그런가…?」
(그냥 드레스가 하얄 뿐이잖아…?)
나른해 보이는 나와 싱글벙글하는 메니가 복도를 걸어갔다.
「아멜리 큰언니, 굉장히 의욕 넘쳐 보였고 재밌게 파티하다 오면 좋겠는걸」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응?」
「레이첼 파티니까」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야?」
「무섭다고 해야 하나…」
아이 같지.
「레이첼은 옛날부터 남하고 자기를 비교 안 하고는 못 배기거든. 부자에게는 흔한 성격이야. 특히 아멜리에 대해서는 레이첼도 소꿉친구고 비난하는 경향이 거세지. 아멜리도 그래. 레이첼은 특히 태도가 나빠진다.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둘 사이에 불꽃이 팟팟 튀었다.
「둘 다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알고 있으니깐 괜히 불타오르는 거 아냐? 정말 시답잖아」
「소꿉친구라. 부럽다. 나 동경하고 있거든. 소꿉친구. 난 그런 친구 없으니까」
(친구라고)
나도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까.
(………)
아니,
혼자서,
눈 속에서,
장갑을――――――.
(……………)
――――왠지 심란해.
「언니?」
시선을 돌렸다. 멀뚱히 메니가 나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이 나를 바라봤다.
(그 눈)
보면 볼수록, 눈을 마주칠수록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증오와 원망과 질투가 나를 뒤덮어갔다.
그야 너는 그 때도 왕자님이라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잖아?
이야기의 결말에 있는 해피엔드의 다음을 스스럼없이 메니는 보내고 있었겠지?
추한 우리가 고통받게 되고 아름다운 너는 행복해졌다.
이걸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메니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메니를 쳐다봤다.
메니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메니에게 손을 뻗었다.
메니의 무방비한 손에 거기에 있었다.
나는 손톱을 세웠다.
메니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손톱을 향하고 손을 뻗어,
활짝 웃으며 메니의 손을 꼭 잡았다.
「좋은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네」
그러자 메니가 입꼬리를 올려 엷게 웃으며 끄덕였다.
「성 아랫마을에 가봤더니 친구가 아무도 없더라. 저는 번화가에도 안 가고」
「조만간 생길 거야. 앞으로 파티에 많이 나갈 거고 거기서 마음이 맞는 아이와도 만날 기회도 생길 거야」
「친구, 만들 수 있을까」
「만들 수 있어」
나는 부드럽게 메니의 손을 움켜쥐었다.
「메니는 착한 아이잖아. 분명 메니처럼 배려심이 많고 상냥한 아이가 네 친구가 되어줄거야」
「…그러려나?」
「그럼」
메니가 고개를 숙이고 수줍은 듯이 웃었다.
「…그러면 좋겠네」
―――이걸로 만족해? 메니.
나는 메니에게 계속 싱긋 웃어 보였다.
「괜찮아. 파티에서는 나도 아멜리도 있는걸. 말 거는 아이가 올 때까지 우리랑 같이 있으면 돼」
「언니, 나 파티는 별로 참석한 적이 없어. 그래서 가면 너무 긴장되거든. 몸이 움직이게 돼」
「저번에도 완전히 굳어있었지」
「하지 마, 부끄러워」
메니가 살짝 움찔해서 눈썹을 움푹 찌그러뜨렸다.
「역시 귀족은 파티에 참가해야 하지?」
「응. 많이. 교류회니까」
「싫다…」
「참가해서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야. 많은 부자랑 안면도 트고 친구도 사귈 수 있어. 멋있는 남자애도 많아」
「…아직 그런 거 관심 없는데」
메니가 시선을 돌렸다. 나는 계속 미소짓는다.
「그런 말 하지 말구」
괜찮잖아. 뭘 입어도 넌 예쁘니까.
괜찮잖아. 뭘 입어도 넌 빛나 보일 테니까.
지금은 아직 조그맣고 귀여운 아가씨.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름다워질 메니를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영애들에게서, 신사들에게,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메니를 상상할 수 있다. 일부는 메니의 존재에 질투를 일삼을 것이다. 메니만 튄다고 화내겠지. 나도 그 감정을 가슴에 떠안고 메니의 곁에 계속 있을 것이다.
아무리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메니에게 까발릴 수는 없다.
나는 메니에게 사형당하지 않기 위해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아. 그러면 나의 미래는 구원받을 것이다.
싫은 건 안 보면 그만이야.
싫은 건 안 들으면 그만이야.
정보만 내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질투라는 추악한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다.내 안에서 유일하게 질투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야.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귀를 막는다.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메니는 인기가 많아질 것이다. 미인이고 소탈하고 상냥한 메니. 누구나 동경하는 존재가 되고 나가는 파티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내 차례는 없다.
혼자 멍하니 달이라도 쳐다보고 파티가 끝나는 시간까지 달하고 대화라도 하며 틈을 때울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이 미움이라는 괴로움에서 해방된다.
조금이라도 이 찝찝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메니가 멋진 신사와 춤추고 있는 동안 나는 혼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녀석이 파티에 익숙해져야지)
「메니, 파티에는 꼭 참석하렴」
나는 웃음을 띠며 추천했다.
「친구도 지인도 사귈 수 있고 이득 되는 것뿐인걸. 푸념이라도 해도 돼. 무도회도 재밌어.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그래서 언젠가, 그렇지. 메니가 조금 더 자라면 동화 속 공주님처럼 운명의 왕자님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방긋대며 말했더니 메니가 시선을 떨군 채 입을 열었다.
「나」
문득 중얼거렸다.
「왕자님 따위 안 만나도 돼」
나는 멍해졌다.
메니의 손이 꼭 내 손을 잡았다.
「메니?」
얼굴을 들여다보니 메니가 내 시선을 피었다. 나는 미소 지었다.
「잠깐 갑자기 왜 그러니?」
메니가 입을 다물었다. 내 손을 잡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상냥하게 웃었다.
「메니는 왕자님과 결혼해서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거야?」
「결혼하면 그걸로 행복해?」
메니가 인상을 쓰며 표정을 흐렸다.
「나는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운명의 상대라도 그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면 행복해질 리가 없어」
「………아?, 그렇구나」
나는 웃으며 말했다.
「후후. 너, 또 이상한 책이라도 읽었지」
어른이 보는 책을 읽었겠지.
「어려운 책을 읽고 남자라는 것에 불신을 갖게 된거구나. 그렇지?」
「………」
「정말, 왜 그렇게 헛똑똑이니? 너는」
나는 메니의 손을 잡아당기고는 걸어나갔다. 끌려가게 된 메니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 방을 지나고 메니의 방까지 걸어가 멋대로 문을 열어 재꼈다.
「실례 좀 할게」
한마디 하고 메니 방으로 들어왔다. 메니는 당황해 있었다. 메니에게서 손을 떼고 방 안의 책장에 가까이 가 내가 선물한 책을 집어들었다.
「자, 메니 잘 보렴」
책을 펴고 페이지를 메니에게 보여줬다.
「사과에 들어 있는 독의 저주로부터 공주님을 구한 왕자님」
페이지를 폈다.
「영원히 잠에 빠지는 저주에서 공주를 구해내는 왕자님」
페이지를 폈다.
「용감한 왕자님」
페이지를 폈다.
「공주님을 지켜주고 귀여워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왕자님」
페이지를 폈다.
공주의 손을 잡는 왕자의 그림을 보여줬다.
「멋지지 않니」
메니를 바라봤다. 메니가 책을 보고 나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건 책 속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잖아?」
「뭐야. 왕자님한테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어?」
그것도 아니잖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왕자님 따위 필요 없다느니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결혼 할 거면서. 어차피 행복해질 거면서.
「멋지잖니. 왕자님」
「언니 그런 얘기보다 더 재밌는 게 있어」
메니가 다른 페이지를 폈다.
「여기」
빨간 두건을 뒤집어쓴 소녀 그림.
「이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
(애 같긴)
하긴 어릴 때는 다 그렇지. 연애 사건 따위는 관심 없어. 나는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 거라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말이야, 생물이란 생각이 변하는 법이란다. 메니)
너도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왕자님과 좋아하고 결혼하게 되는 너도 알 때가 올 거야.
(이젠 저런 꼴은 보여주지 마)
내 눈앞에서 떨어져 있는 유리구두를 신다니. 그 인연으로 왕자님이 쫓아오다니.
(그런, 사랑이 넘치는 광경)
다시는 내 눈앞에 보이지 마.
「맞다. 언니, 이왕에 언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보여주고 싶은 거?」
(그게 뭔데)
메니가 책상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노트를 꺼내 내 걸 폈다.
「짜잔」
적혀 있던 것은 시골 슬로우 라이프 계획표.
(…………)
뭐야, 이 녀석.
(전에 말했던 거 진심이었어?)
우와, 기분 나빠.
「호오. 이게 뭘까. 네가 생각한 거니?」
「응!」
「봐도 돼?」
「응!」
노트를 펼쳤다. 메니의 가지런한 글씨로 쓰인 꿈에 대한 낙서가 많이 있었다. 옆에서 메니가 노트를 들여다보며 말을 꺼냈다.
「있잖아, 넓찍한 목장을 장만할 거야」
「흐음」
「거기서 여러 과일을 키우려고! 사과라든지 포도라든지 체리라든지 여러가지!」
「오」
「동물도 키울 거야! 소도 말도 닭도 있고 애완동물도 두려고. 사이좋은 개랑 고양이」
「흠」
「근처에는 교회가 있어서 우리가 소젖을 신부님께 전달하는 게 일과야」
「헤」
「그래서 말이야, 근처 숲에는 늑대가 있어서 항상 목장을 노리니까 조심해야 해」
「헤에」
「가끔 어머니와 아멜리 언니가 놀러 와서 같이 신선한 우유랑 빵을 맛보기도 해. 치즈도 있어!」
「와」
「어때. 기대되지」
「정말. 굉장하네」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생활 동경하게 되네」
「언젠가 꿈을 이룰 거야! 나 용돈 모으고 있어」
「그렇구나. 목장비도 만만치 않을 거고」
싱긋 웃으며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금해야겠네」
「응」
조금 전까지 흐려졌던 표정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메니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단순한 꼬맹이)
너의 말 하나하나에 기분이 좌우되는 나도, 정말 철부지 그 자체지만
(어쩔 수 없는걸)
싫거든, 네가. 죽도록 싫어.
「그래, 메니. 잠깐 인형 놀이하자」
「응?」
「목장 놀이 할까」
그걸로 만족해 주겠니.
나는 인형을 잡았다.
「난 이 아이」
나는 인형을 가리켰다.
「이 아이는 메니」
「아, 그러면」
메니가 눈을 반짝이며 인형의 집 앞에 털썩 앉았다.
「이게 집이네! 그리고」
메니가 인형의 집 근처에 오두막을 놓았다.
「이게 외양간! 그리고…」
메니가 사람 인형과 봉제인형을 추가했다.
「여기 늑대. 이게 나무꾼 씨. 항상 도끼를 들고 다녀. 그래서 이쪽에 할머니」
메니가 인형을 배치해갔다.
「할머니는 편찮으셔서 누워있어. 나하고 언니는 신선한 우유를 할머니께 가져다 드리고 있어!」
「헤에」
「테리, 메니, 오늘도 우유 고맙구나! 천만에! 할머니! 항상 하는 일인걸! 빨리 나아야 돼!」
메니가 인형을 이용해 소연극을 했다. 나는 인형을 든 채 환하게 웃었다.
(좋아. 상대해 줄게)
그런데 이번만이야.
(너랑 둘이 사는 시골생활이라니, 농담이라도 하지 말라고)
「언니, 늑대는 조심해야 해」
「응, 그렇구나 메니」
어린애 말투로 메니와 놀아줬다.
(이것으로 만족하지그래)
(나는)
너랑 떨어질 수 있다면 뭐든 좋아. 제발 순순히 눈을 감게 해줘. 귀를 막게 해줘.
네 쓸데 없는 정보를 나한테 쏟아내지 마.
닥 치 고 있 어 .
「언니, 나무꾼 역 해줄래?」
「여어, 메니. 안녕」
「안녕, 나무꾼 씨!」
이 세계는 불합리하다.
증오하고 질투하는 사람을 악으로 몰아세운다.
나는 악이고 메니는 선.
그 이면에 어떤 생각들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업로드가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덜 바쁠때 진도 많이 빼려고 노력중입니다
완결까지 번역을 마치는 날을 끝까지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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